안산시 역사2

안산시 역사2 소개

안녕하세요.
안산호빠입니다.

오늘은 안산호빠와 함께 조선시대 안산 치소의 위치와 이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산시 역사2

조선시대 안산 치소의 위치와 이동

조선 개국 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개국한 후 3년째인 1394년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그의 아들 태종은
지방행정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고려시대의 5도 양계 체제를 8도 체제로 재정립하였다.
다섯 개의 도와 두 개의 계가 8개의 도로 바뀌었으므로 새롭게 하나가 늘어난 셈인데 결국 경기도의 신설로
요약할 수 있다.
대체로 5도 양계 중 양광충청도가 조선의 충청도로, 경상진주도가경상도로, 전라주도가전라도로, 교주도가강원도로,
서해도가황해도로, 북계가평안도로, 동계가함경도로조정된것이다. 경기도가새롭게생성된형상이나 실상은 경기도도
고려말에는이미거의정립단계에있었다.
고려시대에는 5도양계외에 왕경 개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995년(성종14)에 일종의 직할지인 적현赤縣 6읍과 기현畿縣 7읍을
개경주변에 설치하고 개성을 포함하여 이를 경기京畿라 불렀는데 조선의 경기도가 바로 이에 근간한다.

조선 개국전

조선이 개국하기직전인1390년(공양왕2)에 양광도 소속의 16읍과 교주도 소속의6읍, 서해도 소속의 9읍 등 모두 31읍이
한꺼번에 경기좌도 및 경기우도로 분속되었으니 44읍에 달하는 경기는 이미 도급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이때 안산도 도속道屬을 양광도에서 경기좌도로 바꾼다.
조선 초기 안산의 연혁은《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확인할수있다.

d)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인데 신라가 장구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안산군으로 고쳤
고, 현종 무오년에 수주 임내에 소속되었는데 후에 감무를 두었다. 충렬왕 34년 무신
년에 문종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승격하여 지군사가 되었다. 본조도 그대로 따랐다.
本高句麗獐項口縣 新羅改爲獐口郡 高麗改爲安山郡 顯宗戊午 屬水州任內 後置監務 忠烈王三十四年
戊申 以文宗誕生之地 陞爲知郡事 本朝因之《세종실록지리지》 ( 안산

e)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장구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
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내속하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충렬왕 34년에 문종이
태어난 곳이라하여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 본조도 그대로 따랐다.
本高句麗獐項口縣 新羅景德王改獐口郡 高麗初改今名 顯宗九年來屬後置監務 忠烈王三十四年 以文
宗誕生之地 陞爲郡 本朝因之《동국여지승람》 ( 안산)

자료 d)에서 현종 무오년은 현종 9,년 즉 1018년이다.
《고려사》에 단순히 현종9년에‘내속’되었다는 내용이 수주 임내가 되었다는 것으로 자세하게 기술되었을 뿐,
위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자료 c)의《고려사》기록과 같다.
이로부터 안산은 양광도에서경기도로 편입된 1390년이후 《세종실록지리지》가편찬되는1454년 상황까지 연혁에
특이한 변화가 없는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이후 1486년과 1499년에 수정과 개정을 거듭하여 1530년(중종 25)에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증보되었다.
자료 e)에 보듯이《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은《세종실록지리지》와 같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단계에서도 내용이
그대로 전사되므로 1390년 이래 16세기 초반까지 명칭이나 소속에 변화가 없었음을 추론케 한다.
그러나《동국여지승람》고적조에는 오늘날 언젠가 안산군이 치소治所를 옮겼다는 중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치소란 행정중심지를 의미하는데 오늘날 군청소재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동헌東軒, 객사客舍, 작청作廳, 창고, 감옥등의관공서가밀집된장소를일컫는다.

안산시 역사2 고적조의 내용

f) (고적) 장항폐현.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고성. 군의 서쪽 2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9,565척이다.
(古跡) 獐項廢縣. 在郡西三十里 古城. 在郡西二十五里 土築周九千五百十五尺 (《동국여지승람》안산군 고적조)
《동국여지승람》고적조에는 위와 같이 장항폐현과 고성에 관한 간단한 기사가 실려 있다. ‘장항폐현’이란 옛 장항구현
(또는 장구현)을 의미한다. 즉 신라나 고구려 때 존립했던 장항구현의 치소가 당시 안산군의 서쪽 30리에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지리지가 위치를 표시하는 방식은 4방 또는 8방의 방향과 거리를명시하는 것인데,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각 위치 표현의 기준점은 당시 군현의치소가 된다. 따라서‘在郡西三十里’라는 것은 당시 치소에서 서쪽 방향으로 30
리 떨어진 지점에 옛 장항구현의 치소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옛장항구현의 치소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안산군 치소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안산군의 치소를 비정하는 데에는 약간 복잡한 내용이 얽혀
있다. 우선 조선시대 치소의 위치를 자료가 많은 가까운 시기로부터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보자.
1914년 안산군이 시흥군과 병합되기 직전 안산군의 치소는 수리산 서록 오늘날 상록구 수암동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대해서는 1890년대에 제작된《구한말한반도지형도》, 1872년에 제작된 군현도,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치소가 수리산남쪽에 그려져 있지만 석곡역의 동쪽에 그려진것으로
보아 수암동 치소터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석곡역은 오늘날 양상동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는데《대동지지》에 치소의 서쪽 5리 지점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치소와 석곡역은 2.5㎞정도 떨어져 있다. 안산의 치소터에는 일부 읍성 성벽과 남문터(평근루)가 남아 있고
안산 관아 ∙ 향교 ∙ 사직단 등이 읍성 주위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1년에 경기도 기념물 127호로 지정되었다.
중략…

출처 안산시청

안산시 역사2 소개 끝

안산호빠 안산시 역사2
홈으로
안산호빠 안산시 역사2
구인구직은 호빠야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